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여자의 손톱 0.5밀리가 역사를 바꾼 얘기.

최해녕 |2006.04.24 22:46
조회 405 |추천 0
서울시내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한강다리를 넘으면 바로 '압구정역'입니다.
'압구정역'이 있는 '압구정동'은 옛날 조선시대 세조임금이 왕위에 오를 때
혁혁한 공(1등공신)을 세운 덕분에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여
벼슬이 영의정(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까지 오르는 것은 물론
자신의 딸을 세조의 아들인 '예종'의 왕비(장순왕후)로 시집보내는가 하면
세조의 손자인 '성종'의 왕비(공혜왕후)로도 시집보내는 등,
세조 때부터 예종, 성종 임금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수십년 동안 최고의 권세를 누린 당대의 최고 권력가였답니다.

바로 그 한명회가 지금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압구정(押鷗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군요.
지금은 정자는 없어졌지만 좌우간 그 정자의 이름을 따서
그쪽 동네이름을 '압구정동'이라고 붙였다는군요.
압구정동 하면 우리나라 전체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동네일 겁니다.

그렇게 짱짱하게 잘 나갔던 한명회란 어르신이 돌아 가신 후에는
성종임금의 아들인 '연산군'이 임금에 올랐을 때는
자신의 묘가 파헤쳐지고 관을 꺼내 시신(유골)의 목을 베는 형벌인
'부관참시(剖棺斬屍)'형을 당하는 극형을 받기도 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며 할아버지가 임금일 때 최고의 충신이었던
한명회를 이미 죽은 후에도 묘를 파헤쳐서 시신에까지 분풀이를 했던
'연산군'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중에서 최고의 폭군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예종이니 성종이니 하는 호칭은 재임중에는 그렇게 불리지 않고
나중에 죽은 후에 붙여지는 '묘호(廟號)'라고 하는군요.

해당 임금이 재임중에 전쟁이 났었거나 나라가 몹시 어지러웠을 경우엔
태조, 세조, 선조처럼 뒤에다 '조(祖)'자를 붙이고,
평화로웠을 때는 세종, 예종, 성종과 같이 묘호 뒤에다 '종(宗)'자를 붙였다는군요.
그런데 '연산군'의 경우에는 다 같은 임금이었는데도...
'조'나 '종'을 붙이지 않고 그냥 왕자를 칭하듯이 '연산군'이라고
붙인 이유는 그만큼 재임중에 못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왕자로 강등당한 거랍니다.

그런데 연산군이 처음부터 그렇게 못된 임금은 아니었답니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임금은 역대 임금중에서 성군으로 불릴 정도로
좋은 임금이었던 바 그런 아버지의 아들인 연산군도 상당히 똑똑했으며
성종임금이 돌아 가시고 임금이 되어 재임기간 12년기간중에서
11년동안에는 민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하고
북방의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정책을 펴는가 하면
'국조보감'을 펴내고 '여지승람'을 수정하는 등 상당한
치적을 남기면서 잘 나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좌우간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서 강화도 부근 교동도로 귀양까지 가는 등
천하의 나쁜 임금으로 남아 죽고난 후 묘호조차 임금의 묘호가 아닌
일개 왕자처럼 '연산군'이라고 지어진 것을 보면 후세 사람들
특히 연산군한테 당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연산군을 미워했는지 짐작이 갈만 합니다.
그토록 미운 사람에 대해서 기록을 하면서 절대로 좋게 남기진 않았을 겁니다.
좌우간 조그만 잘못도 크게 부풀려서 천하의 나쁜 넘이라고 했을 겁니다.
심지어 막판에 한 짓거리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어릴 때부터
'싸가지가 없는 넘'이었다고 몰아 부쳤을 겁니다.
멀리 볼 것 없이 가까운 과거에 역대 대통령중에는
천하의 독재자로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론
우리나라가 이정도로 먹고 살만하게 만든 분이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 대통령에게 당했던 사람은 절대로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나쁜 넘으로 만들어야지만 직성이 풀리지요.

아마도 연산군이 쫓겨 난 후에도 연산군한테 당했던 사람들은
연산군을 '천하의 나쁜 넘'이라고 했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재임기간중 아무리 좋은 일을 한 적이 있다고 해도 그런 치적은
가능한 기록에 남기지 않고, 최대한 나쁜 일 한 것만 남길려고 했을 겁니다.
그래서 후세인들에겐 연산군이 실제보다 훨 '나쁜 넘'으로
알려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왜 11년간이나 잘 나가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헤까닥 했을까요?
그렇게 된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연산군이 원래부터
'싸가지가 없었던 넘'이었기에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아주 사소한 일이라면 일일수도 있는데...
다름아닌 연산군 엄마의 손톱이 쬐금 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여자들중엔 손톱을 일부러 길게 기르기도 하고
그런 손톱에다가 알록달록하게 색을 입히는 여자들도 있지만
옛날에 그것도 임금의 마누라인 여자의 손톱이 길어봤자 얼마나 길었을까요.
서양에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연산군 엄마의 손톱이 0.5mm만 짧았더라도
우리나라의 역사가 많이 달라 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연산군의 엄마가 역사책을 쥐어 뜯었던 것은 아니고
단순히 여자의 질투심이 남편의 얼굴에 상처를 내게 되었고
아들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남긴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분풀이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꿀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당시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이 달아 나고
이미 죽어서 묘지에 묻혀 있는 시신까지 꺼내서 분풀이를 당하게 되는가 하면
결국은 임금이 임금자리에서 쫓겨나 서해바다의 조그만 외딴섬으로
귀양까지 가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때는 먼 과거로 돌아 가서 연산군이 네살쯤 되던 해에 벌어진 일인데...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임금은 상당히 학문을 좋아한 지식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여자를 엄청 밝히는 취미도 있었는데 마누라가 12명이며 그런 마누라들한테서 낳은 자식이 모두 합하여 28명이나 되었답니다.

첫째 왕후는 한명회의 둘째 딸인 '공혜왕후'였지만 나이 17세 때 시집와서
아이도 낳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왕비가 연산군을 낳은 '제헌황후' 윤씨인데, 윤씨는 처음부터 왕비로 시집온 것은 아니고,
원래는 궁녀로 들어왔다고 하는군요. 궁안에 이런저런 일을 하는 궁녀들은
원래는 양반집안의 딸이긴 하지만 본처소생은 아니고 첩에서 난 '서녀'들이였지만,
세종대왕의 아들인 문종임금 때부턴 '서녀'가 아닌 본처의 소생인
진짜 양반 딸들도 궁녀로 데려다 놓았다고 하는군요...

이마도 이렇게 된데는 임금이란 작자들이 자기 마누라로 정해준
여자들만 상대한 것이 아니라 궁안에 있는 여자들중 자기 눈에 띄는 여자는
아무나 건드렸기 때문에... 그렇게 임금이 한번 건드린 여자는
결국은 임금의 첩(후궁)으로 삼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선
비록 아버지는 양반이지만 첩에서 난 자식은 '양반이 아닌 바' 지체가 낮은
서녀들은 곤란했다 이겁니다. 첩에서 난 딸이라고 해서
본처 소생에 비해 인물이 딸리거나 임금의 마누라 노릇 못할 것도 없지만
단지 양반신분인 자들이 자기네보다 천한 계급의 여자들이 하루 아침에
임금의 마누라가 되어 버리면 결국은 자기네들이 굽신거려야 되는데...

임금이 궁녀들을 건드릴 때 양반이냐 서녀냐 신분을 따져 골라서 건드리면 좋은데
그런 건 전혀 따지지 않고 그냥 인물 반반하고 몸매만 좋으면 건드리게 되니까
언제 어떤 여자가 걸릴지 모르니까 아예 궁녀들도 진짜 양반 딸로 채웠 놨다고 합니다.
이런 조치는 순전히 임금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네 체면 때문이었을 겁니다.
연산군의 엄마인 윤씨도 아버지가 집현전에 들락거리는 벼슬을 했기 때문에
소위 뼈대있는 양반집 딸이었지만 궁녀로 차출되었다고 합니다.
윤씨는 성종 임금보다도 나이가 12살이나 더 많은 연상의 여자였지만
재주가 있고 미모가 뛰어난 소위 재색을 겸비한 매력적인 여자라서
성종 임금의 눈에 딱 걸려 들어서 성종 임금의 후궁이 되었답니다.

당시 후궁들이 여럿 있었지만 대부분 나이가 어려서 임금하고 몇날 밤을 자도
임신이 될 가망성이 별로 없었지만, 윤씨는 여차하면 임신이 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성숙한 여자라서 그런지 바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자식을 만들게 된 성종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다른 후궁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숙의 윤씨'만을 이뻐하게 되었으며
당시 중국의 고관 부인들이나 차고 다녔던 밀화노리개를 선물하는가 하면
아들만 나으면 바로 왕비로 올려주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게 바로 '연산군'입니다.
성종 임금이 그렇게 바라던 첫 아들인 '연산군'을 끔찍히도 이뻐했다는군요.
성종 임금이 유난히 여자를 밝히는 걸 아니깐
당시 내로라 하는 뼈대있는 양반집안에선 인물 반반한 딸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 않혔던 덕분에
연산군을 낳은 윤비외에도 후궁이 10명이나 더 있었답니다.
여러 후궁들이 저마다 든든한 빽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소용 정씨'와 '소용 엄씨'라는 후궁은 성종의 엄마인
'인수대비'가 적극적으로 후원을 해주는 후궁이었답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성종이 자기 엄마에게 문안인사를 오면 은근히
오늘 밤에는 '소용 정씨'나 '소용 엄씨'와 자라고 권하기도 했답니다.
좌우간 시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연산군의 엄마인 윤비는
자기 아들보다도 나이가 12살이나 더 많은데다가
친정 아버지도 일찍 죽었고 이렇다 할만한 빽줄도 없는
소위 별 볼일 없는 며느리로 여겼을 것입니다.
연산군이 태어나고 얼마 동안은 성종이 자기 아들을 낳아준
'윤비'가 엄청 고맙고, 이뻤고, 그래서 자주 찾았겠지만
원래가 여자를 밝히는 성종인지라 차츰차츰 다른 후궁들도 찾게 되었을 겁니다.
오늘은 정씨, 내일은 엄씨, 모레는 김씨, 그 다음날은 권씨...
이런 식으로 매일 밤마다 다른 마누라를 찾아도 10일마다 한번씩 차례가 돌아오는데,
제 아무리 여자를 좋아하는 성종이긴 하지만 변강쇠는 아니었을 것인데,
그리고 평소 학문을 좋아했던 성종인 바 이래저래 할일도 많았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마누라들은 한달에 한번 남편의 얼굴을 보기 힘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성종이 모처럼 윤비의 처소를 찾게 되었는데...
윤씨는 속으론 너무너무 기뻤겠지만 겉으론 오히려 비아냥 거렸답니다.
성종이 그동안 자주 찾아오지 않아서 미안하다며 윤비를 껴안으려 하는데
윤비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손으로 남편을 밀쳐 내는 척 하려다가
그만 며칠간 깎지 않았던 손톱이 성종의 얼굴을 긁게 되었다 이겁니다.

원래 후궁 뿐만 아니라 임금과 잠자리를 함께 하기로 된 궁녀들도
목욕하고 몸단장을 하고 손톱과 발톱을 깎고 기다리도록 되어 있었답니다.
아마 윤비의 경우도 사전에 성종이 '오늘밤엔 니한테 갈께'라고
사전에 언질만 줬어도 목욕은 물론 손톱 발톱을 깔끔하게 깎았을 텐데...
이 양반이 갑자기 들이 닥치는 바람에 미처 손톱을 못 깎았던 것 같습니다.
원래 손톱 발톱을 짧게 깎은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왕비의 손톱이 비록 며칠간 손질을 하지 않았다고 쳐도 길어야 얼마나 길겠습니까
성종 입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나봐야 약간 긁힌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 정도쯤이야 성종입장에서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정도였겠지만
평소 며느리를 못 마땅해 하던 시어머니(인수대비)가
아들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며느리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작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사소한 실수이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인수대비는 자기 끄나풀인 대신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그걸 여론화시켜선
결국엔 며느리인 윤비를 폐비를 시켜서 궁밖으로 쫓아내 버렸던 것입니다.

사소한 자신의 실수로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윤비이지만
결코 남편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검소하고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밥도 잡곡밥으로 반찬은 소금으로만
하루 세끼를 먹었으며 옷도 무명옷으로 입고, 화장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남편의 건강과 아들의 안녕을 빌면서
가는 성종이 자신을 다시 궁안으로 불러 들일 날만을 기다렸답니다.
성종은 쫓겨난 윤비가 그리워서 하루는 조용히 내관을 하나 불러
윤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번 가보고 오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만
그 내관이 윤비가 사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고 그대로 성종에게
보고하려고 대궐로 돌아 오던 중에 그만 후궁인 '엄귀인'과 '정귀인'에게
불들려 인수대비에게 끌려 가게 되었는데 인수대비는
내관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한편으론 협박까지 해가면서
'폐비마마는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으며,
언제나 비단 옷에다 진한 화장을 하며, 아직도 자신이 중전마마인 양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가관이었습니다.'라고
완전히 정 반대의 거짓 보고를 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엔 엄마인 인수대비와 여기에 합세한 정귀인과 엄귀인등이 성종을 부추겨
1482년 대신들과 상의한 끝에 윤비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윤씨는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기 직전 그 곳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길
'언가 나의 한맺힌 원혼을 내 아들 '융(연산군)'이 대신 갚아 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좌우간 인수대비이하 윤비를 죽게한 대신들은 아직 어린 연산군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려 한동안 아무 일없이 잘 넘어 갔는데...
그로부터 23년 후인 연산군이 임금이 된지 11년째 되던 해에
'임사홍'이란 작자가 연산군에게 과거의 이런 사실을 꼬질러 바쳤던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임금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라도 자기를 낳아준 엄마가
별로 잘못한 점도 없이 너무도 억울하게 죽었단 소릴 듣게 되면
'에이시 울엄니 손톱 좀 깎지 그랬어 ~'라고 그냥 넘겨 버릴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아무렇지 않은 기분으로 그냥 넘길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임금이 자기 어머니가 그렇게 죽었단 소릴 듣게 된 연산군의
기분이야말로 '헤까닥' 안하곤 못 베겼을 겁니다.
좌우간 그 당시에 자기 엄마가 죽게하는데 가담한 자들은 몽땅 처리를 해버렸죠
그게 바로 역사책에도 나오는 유명한 '갑자사화'였습니다.
성종이 윤비에게 찾아온 날 윤비의 손톱이 0.5밀리만 짧았어도
애초 '갑자사화'란 사건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연산군 또한 아버지 못지 않는 성군으로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여자의 손톱 0.5밀리가 그리고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 며느리인 윤비간의
고부갈등이 이토록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글.紫微垣
▒ 웨프(http://wef.co.kr)에서 '고부갈등,갑자사화'로 검색하시면 결혼선배들의 다양한 120만개의 정보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출처 : 결혼검색 웨프(http://www.wef.co.kr)
참조 : 신세대 결혼전문 잡지, Wedding21 (http://www.ewedding21.com)
참조 : 2006 F/W 한국결혼박람회 (http://www.weddingfestival.co.kr)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