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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처녀까발리기(6화)사랑은, 언제나 유턴을 한다

까미유 |2006.12.12 09:12
조회 682 |추천 0

 제 6 화  사랑은, 언제나 유턴을 한다.




 

“이제 외박까지 하시고? 어디서, 누구랑 같이 있은 거야? 휴대폰은 왜 꺼놓고? 전화는 왜 못 해?”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해대는 지란을 향하여 나는 두 귀를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아침부터 딱딱 딱딱, 시끄러워 못 살겠네.”

 

그런 나의 손을 지란이 거칠게 떼어내며 노려보았다. 나는 말없이 그런 지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난, 니가 한 행동이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슨 말인가 싶어 지란을 돌아보자 나를 노려보던 시선을 풀고 금세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잘했어. 친군데 그 정도도 못 해? 혜나 때문에 속상해서 서초동에 간 거야?”

“알고 있었어?”

“어제 서초동에 전화했더니 올케언니가 받더라. 자초지종을 들었지.”

“난, 괜찮으니까 출근이나 하셔. 안 늦었어?”

“니가 오지랖은 좀 넓어서 그렇지, 혜나에게 그렇게 욕먹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친구.

괜히 십 년 우정, 이번 일로 깨지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 그리 알고, 나는 이만 출근을 해야겠네.

이따 저녁에 밖에서 맥주라도 한 잔 하자. 나, 간다.”

 

현관으로 뛰어가는 지란의 뒤를 따라 나섰다.

 

“누군 좋겠다. 일수 안 찍어도 되고.”

 

신발을 꿰 차며 지란이 말했다.

 

“일수?”

“출근 도장 말야. 이건 매일 아침 일수 찍는 기분이라니까.”

“나도 십 년 동안은 일수 열심히 찍었다 왜 이래?”

“그래, 내가 그 십년을 채우느라 이렇게 바쁘잖냐. 나중에 전화할게.”

 

지란이 나가자 그제야 나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삼일 째 조깅을 쉬고 있었던 탓인지 온 몸이

쑤셔댔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내 앞으로 온 고지서들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관리비 청구서와 카드대금 고지서 두 장. 카드대금 고지서를

펼치는 순간 나는 한숨부터 흘러 나왔다. 젠장.


 

사랑은 아주 오래 전에 끝났음에도 제일 늦게까지 남는 건 미련보다도 이 카드대금 고지서였다.

첫사랑과 이별한 후 매달마다 꼬박꼬박 날아오는 건, 카드 고지서뿐. 헤어지고도 다섯 달 동안 나는

그 고지서 때문에 실연의 상처를 다섯 번이나 다시 겪게 되었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한 일을 되돌

아보면, 꼭 해야 할 일을 제 정신으로 한 일은 없고 별것 아닌 일들을 얼떨결에 해치운 것들이 고스

란히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이 고지서가 아닐까. 두 번은 하지 않아야지 하면서도 매번 사랑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고지서가 최후의 통첩이 아직도 남았다는 듯 매달 내게로 배달되는 것이다.


일 년 전 12개월 할부로 그에게 선물했던 파나소닉의 카오디오는 이번 달이 마지막 대금이었다. 이

뼈저린 후회. 마음은 떠나고, 빚만 남았던 지난 시간. 이것으로 그와의 남은 빚은 모조리 청산되는

것이리라. 아까운 내 돈. 으흐흑.



 

큰 나무보다도 어려운 것이 잔가지 치기다. 나는 사군자를 배우고 싶다 했다. 스승은 겉멋만 들었다

고 오히려 꾸중을 하셨다. 가지나 잘 치라는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가지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오늘따라 가지는 마음과는 달리 자꾸 엇나가기만 했다. 툭툭 끊어진 가지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마음을 다른 곳에 뺏겼으니 가지가 자라기 힘들지. 그림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화실에 나오지 마라.”

 

그렇게 말하고는 스승은 밖을 나가셨다. 그림을 배우겠다고 온 건지, 마음을 다스리러 온 건지 나도

요즘 헷갈리는 중이다. 나는 일찌감치 그림을 접고, 다른 제자들의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십 년째 배우고 있다는 한 분은 먹과 함께 물감을 섞어 꽃잎을 만들기도 하고, 새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재주가 부러워 나는 넋을 놓고 서 있었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으면 오히려 늘지가 않는 게, 그림입니다. 어디 가서 이 그림을 내밀면 망신

당하기 십상이지요. 제가 십 년째 스승님 밑에서 배우는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지요.”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아직 너무 멀다. 서른두 살이 인생의 전부를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내 나이가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인생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그만큼 깊다는 스스로의 착각이 아닐까.


 

지란의 전화를 받고 나는 화실에서 나왔다. 곳곳에는 곧 다가올 성탄절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벌써부터 취해서, 정작 당일엔 어쩌려구. 캐롤송은 신바람이 났다. 젊은 사람들은 그 신바람

에 절로 웃음꽃이 피는 모양이었다. 어찌하면 저리도 이쁠까. 하지 못해서 안타까운 것 하나 없는

젊음이었는데도, 나는 지금의 십대와 이십대를 보면 자꾸만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조금만 더 그 젊은 날의 시간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우리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혀를 깨물겠군.

나는 약속장소를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대학 때, 단골이었던 막걸리 집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닥 변함이

없었다. 그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는 것이 너무 설레었다. 변한다는 것과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어느 정도의 차이일까. 맨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지란을 보며 나는 신난 얼굴로 뛰었다.

그러다 철퍽. 바닥에 턱이 있다는 것을 잊고는 그 자리에서 발이 걸려 앞으로 꼬꾸라진 것이다.

이 창피함. 아, 쪽팔려 씨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놀란 지란을 보며 수줍게 미소를 날렸다. 옆 테이블에서 보던 젊은

남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렸다.

 

“나는 아파 죽겠는데 니들은 웃음이 나니?”

 

나는 씨익 웃으며 그들에게 말을 던지고 지란에게 다가갔다. 지란 역시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

거렸다.

 

“웃지 마. 충분히 쪽팔리니까.”

“그 덤벙대는 성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안 변하누.”

“여기도 하나 안 변했어.”

 

나는 앉으며 말했다. 인테리어도 예전 그대로였다. 십 년 전의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고향 같잖어. 그래서 우리가 좋아했었구.”

“그러게. 진작 한 번 와 볼걸 그랬어.”

“원래 인간은 과거를 회상만 할 뿐이지 정작 찾을 생각은 못하잖아. 현재에 연연하느라 말야.”

 

지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실내를 훑어보았다. 그때 입구에 혜나가 나타났다. 나는 순간 고개를

돌려 지란을 건네 보았다.

 

“그때도 항상 셋이었잖냐.”

“홀수가 싫다고, 혜나 빼자고 우겼던 건 너야.”

“이젠 홀수가 익숙해. 혜나야, 여기.”

 

우리 쪽을 본 혜나의 표정이 멈칫했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물 잔을 움켜쥐었다.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혜나가 내 앞에 와서 앉았다.

 

“오랜만에 오니까 좋지?”

 

지란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혜나에게 물었다.

 

“그러네. 정말 그대로야.”

 

분위기는 지란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혜나에게 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입을 열지 않았던 건 아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를 몰랐을 뿐. 아마 혜나 역시 그런 마음

일 게다. 지란이 종업원에게 막걸리와 파전, 그리고 치즈계란말이를 주문하는 동안에도 혜나와

나는 탁자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꿀떡이라도 입에 문 거야? 왜 이래 촌스럽게?”

 

보다 못한 지란이 말하자 그제야 혜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니가 내 친구라는 게 언제나 좋았어. 그건 사실이야. 지금도 마찬가지구. 하지만, 내 문제에서는

조언자가 필요한 거지, 해결사가 필요한 건 아니야. 너의 진심을 몰라서 그랬던 건 아냐. 너무 흥분

한 건 미안해.”

 

그녀의 사랑을 내가 나서서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한 행동이 혜나를 대신하여 마침표를 찍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내가 주제넘은 짓을 한 것처럼 비춰졌다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

었다.

 

“흥분의 문제가 아니었어. 내게 너무 함부로 말했어.”

“인정해, 미안해. 흥분한 상태에선 겁나는 게 없어지잖아.”

“알지도 못하면서 까불어 미안하다.”

 

사랑보다 긴 것은 우정이다. 철없던 시절에는 사랑보다 길고, 강한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다면 우리의 우정은 진작에 파경을 보았을 것이다. 여자는 대개 결혼과

동시에 우정이 저절로 정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결혼 후에 여자는 일인

삼역, 일인 오역까지도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했던 것뿐이었다. 우정을 찾는 것에는 조금도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일인 삼역씩이나 해낼 여자

는 없다. 시대가 변해서 여자가 살기 좋아진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박탈당한 여자의 권리를 되찾

은 것뿐이다. 왜 이런 얘기까지 나오게 된 거지? 나는 피식 웃으며 혜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솔직하지 못했던 걸 인정할게. 사실 난, 이런 식으로 내 가정을 잃고 싶지 않아. 그이를 끔찍

하게 사랑해서가 아냐. 다시 누군가를 만나서 시작할 용기도 없을뿐더러, 내 아이에게 다른 아버지

를 만들어 줄 용기도 없어. 그이와 내가 만나서 제일 멋지게 이루어낸 것이 바로 가정이란 거야.

그걸 하루아침에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지금은 그저 그이의 방황을 지켜보기로 한 거야.

다시 돌아온다면, 난 언제든 받아 줄 참이었어. 적어도 지금의 내 마음이 변치 않는 시간 내에서 말야.”

 

나온 술과 안주 때문에 잠깐 혜나의 말이 끊어졌다. 지란은 잔에다 술을 채웠다. 우리는 말없이

잔을 들었다.

 

“일단 건배.”

 

지란이 잔을 내밀며 말했다. 혜나와 나는 지란의 잔에 맞추어 술을 마셨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안되더라구. 미안해. 장담해서 미안하구, 솔직하지 못해서 미안하구,

내 감정 하나도 추스르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 얘. 사랑이 제 맘대로 되는 거였음, 인간들이 서로 지지고 볶고 살지 않아. 마음이

딱 들어맞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질 수 있는 게 사랑이야. 맘 쓰지 마.”

 

내가 대꾸할 새도 없이 지란이 중뿔나게 끼어들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에

대해선 당분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시작해보기도 전에 맥이 빠지는 기분만 들었다.

 

“참, 서영이 너 며칠 전에 술 취해서 들어온 날, 기억이나 하니? 내가 물어본다 하면서도 정신이

없었네.”

 

지란의 화제는 이제 내가 되었다.

 

"필름이 끊겼어.”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사고 안치면 이 서영이 아니지.”

“어떻게 된 거야?”

 

나의 말에 혜나가 끼어들어 물었다.

 

“그날 그 남자한테 업혀 들어온 것도 기억 안 나?”

“나 업혀 왔니?”

 

역시 예감은 적중했다. 이 망할 놈의 예감은 어찌하여 한 번도 틀리지 않을까.

 

“밖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업혀 들어온 꼴을 보니 또 사고 쳤구나 싶더라. 전혀 기억

못 해?”

 

지란이 다시 물었다. 나는 파전을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떻게 아는 사이야?”

 

정신없이 혜나가 다시 물었다. 둘이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다.

 

“몰라 나두. 얼결에 그렇게 됐어. 그만 물어. 더 이상 대꾸할 말도 없으니까.”

“나, 니네들한테 할 말이 있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지란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와 혜나는 치즈계란말이를 한 입 넣으며 지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며칠 전에, 나 선 봤어.”

“어?”

 

나와 혜나는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 바라보았다.

 

“선 봤다구.”

“글쎄, 갑자기 무슨 선이냐구.

“그렇게 됐어. 중요한 건 그게 아냐. 그 사람이 싫지 않다는 거지.”

“켁.”

 

이번엔 혜나가 놀라며 뱉어낸 소리다. 먹던 안주가 목에 걸린 모양이다.

 

“이거 축하해야 되는 거야, 말려야 되는 거야? 나 헷갈려 혜나야.”

 

나의 말에 혜나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음식을 삼키며 말했다.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우랑 다시 시작하네 마네 그랬잖아.”

“갑자기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어. 난, 사랑을 말하려는 게 아냐. 결혼을 말하는 거지. 결혼을 생각

하니까, 현우를 장담할 순 없더라구. 니네들 말대로 걔가 워낙 갈대 같은 애잖아.”

“그래서 양다리라도 걸쳐 보겠단 심산?”

 

나의 말에 지란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양다리는 무슨. 그게 어디 양다리냐? 관찰이지. 당분간은 그냥 그렇게 만나 볼 생각이야. 내 마음이

어느 쪽이든 확고해지면 답은 나올 거구.”

“잘 생각했어. 돌다리도 두들겨 보라는 말, 그거 맞는 말이야. 더군다나 결혼인데, 그리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구. 난 이미 살아봐서 아는데,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아. 오히려 결혼은 냉정하게도

현실이라, 부족한 게 많을수록 사는 데에는 더 고달퍼 져. 사랑의 전부를 결혼에 두지 않고, 결혼이

란 걸 생각한다면야 말릴 이유 하나 없다.”

 

나는 혜나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랑의 전부를 결혼에 두는 거나, 두지 않는 거나 뭐가 달라? 어차피 목표는 결혼인데.”

“사랑하면서 결혼을 목적에 두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결혼을 목적으로 두고 사랑을 한다면 오히려

감정에 있어서는 쉽게 해결 되지. 왜냐구? 후자는 사랑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는 거지. 전자는

상대가 아니라면 안 되는 일이잖아. 후자는 상대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고.”

 

아, 복잡해. 뭐가 이렇게 복잡할까. 아무튼 사랑은 각자 해석하기 나름인 것만은 확실했다.

 

“뭐하는 사람이야?”

“일류는 아니고, 이류정도의 대학교수야.”

 

혜나의 물음에 지란은 당당하게 자랑하듯 대답했다.

 

“직업은 괜찮네.”

“나이차가 좀 있어서 그게 좀 걸리긴 한데, 그래서 그런지 자상하고 섬세해.”

“몇이나 되는데?”

“마흔.”

 

그 순간 나와 혜나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마시던 술을 확 뿜어냈다.

 

“좀 많긴 하지?”

 

그런 우리를 보며 지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녀는 결혼이 너무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님, 혜나의 남편처럼 그 역시 젊은 여자가 좋은 것일까.

그날 밤, 혜나는 지란의 남자를 궁금해 하며, 나는 갑자기 마음이 바뀐 지란을 궁금해 하며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다행히 필름은 끊기지 않았다.



나는 욕실 손잡이를 잡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애를 쓰고 있었다. 악을 쓰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항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이를 낳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천장이 노래지면서 식은땀이 맥없

이 줄줄 흐르고, 힘 빠진 하체가 문어 다리처럼 치렁치렁한 기분. 아니, 이 기분의 몇 십 배는 되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배설의 문제에 부딪혔다. 며칠째 나의 항문은 쉽게 열리지 못하고 있었다.

변비의 문제였다. 뱃속에 들어 차 있을 오물들을 생각하니 끔찍해졌다.

 

“아악. 하느님, 부처님.”

 

나는 절규를 하며 항문에 힘썼다. 드디어 애쓴 보람 끝에 항문이 열리며 뭔가 꿈틀거렸다. 나는 더

이상 힘 쓸 기력이 없어 그만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 변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에게, 겨우? 검지 손

가락만한 줄기 달랑 하나. 나는 이십분을 넘게 용을 쓴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항문이 쓰라렸다.

아마도 찢어진 모양이었다. 눈물을 찔끔 거리며 욕실에서 엉거주춤 나오자, 휴대폰이 때마침 울렸다. 나는 어기적거리며 걸어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네.”

“잘 있었어?”

 

차세현, 그였다. 하필 이 순간에 전화질이야?

 

“무슨 용건이야?”

 

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허탈하게 물었다.

 

“어디 아파?”

“어. 말할 수 없는 곳, 그 곳이 지금 무척 아파. 그러니까 용건만 간단하게 말해.”

“어디가 아픈데?”

“용건만.”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이따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

“난, 별로 안 땡기는데.”

“내가 땡기니까, 준비하고 있어.”

 

그러고선 끊어진 전화. 이거 진도가 너무 빠르지 않나? 겨우 몇 번을 만났을 뿐인데, 내가 술에 취

해서 업혀 온 이후로 너무 가까워진 듯 한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와 마주치기가 싫어

졌다. 그냥, 확 도망 가 버려? 그러면 이 서영이가 너무 비겁하지. 나는 찢어진 항문을 움켜잡고

엉기적대며 욕실로 다시 들어갔다.


양치를 하면서 며칠 전, 그의 말을 떠올렸다.

 

“이 서영, 너 하나도 안 변했다?”

 

언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 차 세현. 그의 이름은 낯익지 않다. 스물 네 명의 사내를 떠올려

보았다. 맞선 자리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가 결혼에 급한 사람들이다. 대책 없이 나이만 먹은 사내들

이라, 그는 이들 틈에 낄만한 나이가 못 된다. 대학 때 소개팅이라도 했던 녀석일까. 사실, 난 소개팅

경험 또한 몇 번 되지 않는다. 몇 번 되지도 않는 그 자리의 사내들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그럼 대체 어디서 마주쳤단 말인가. 초등학교 동창?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단 한 번도 동창회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 뭐야. 이 자식 이거, 또 나 골탕 먹이려는

수작 아니야.

 

“에라, 모르겠다. 그래, 맞짱이라도 뜨지 뭐. 야, 차 세현. 아무리 니가 강자라고 해도 내가 그리 호락

호락 걸려 들 것 같아? 이판사판이다 나두.”

 

아, 똥꼬 아퍼.



 

누군가 도시에 밀가루를 죄다 쏟아 놓은 것처럼 세상은 정말로 눈부시게 하얗다. 하늘은 밤 새 흠씬

두들겨 맞은 모양인지, 온통 멍 자국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성탄절 아침부터 천장이 노래지도록 똥꼬에 힘주고 있었던 이는 나 밖에 없을 것이다. 지란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몸치장을 하고선 그 늙은 대학교수를 만나러 나갔다. 어쩐 일인지 혜나는 어제부

터 연락이 되질 않고 있었다. 그렇게 성탄절 아침부터 나는 홀로 집에 버려져 있었던 참이었다.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어쩐지 고마운 마음보다는 불길한 심정이 먼저 되어 버렸다. 차 안은 따뜻

했다. 그가 뜨겁게 달궈진 캔 커피를 하나 건네주었다.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캔을 움켜쥐었다.

 

“백마 탄 구세주 같지 않아?”

 

차가 출발하자마자 그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아반떼를 몰고 온 기사겠지. 자동차 디자이너라면서 당신 차는 왜 이 모양이야? 튜닝이라도 좀

하든가.”

“성형미인에게는 자연미를 볼 수가 없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뭐든, 좋은 거야. 당신은 어디 고친

데 없어?”

 

나는 순간 찔끔했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이 쌍꺼풀이, 삼십 만 원짜리지. 야매지만, 티 안 나지? 치아교정도 성형에 속하나? 그럼 두 곳은

고친 셈인데.”

“성형을 해서 그 정도라면, 예전엔 야수였단 말야?”

 

그의 놀림에 나는 흘겨보며 허벅지를 냅다 꼬집어 주었다. 역시 막히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른 날도

아닌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정체가 심했다. 가는 길이 정말이지 멀고도 험했다. 대체 점심은 언제

나 먹을 수 있는 것일까. 한 시간을 넘겨서야 도착한 곳은 용돈이 넉넉지 못했던 대학 시절, 친구들

과 자주 찾았던 Y할매 집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와 함께 할매 집으로 들어갔다.

옛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라 만감이 교차했건만, 그 와중에도 나는 왜 하필 오늘, 이런 곳에 왔나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매운 떡볶이, 좋지?”

 

그건 그때도 즐겨 먹던 메뉴였다. 그 오래 전의 맛이 되살아날까. 나는 아주 얌전해진 숙녀처럼 실내

를 훑어보았다. 곳곳에 손을 조금 댄 흔적은 있지만,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

는 것 같은데도, 아직 이곳을 찾는 몇 몇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왜 나를 이곳으로 데리

고 왔는지 이제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난 기억 못하는데, 당신은 나 알고 있지? 이 집과 상관있는 거야?”

 

나는 긴장하며 물었다.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군.”

 

가슴이 울컥하는 이 기분은 뭘까. 물 잔을 움켜쥐는 내 손이 차츰 떨렸다. 나에게 첫 번째였던 남자,

나의 첫 사랑과의 추억. 이곳은 첫 사랑과 함께 자주 찾던 곳이었다. 돈이 없던 시절, 그와 나는 자주

여기서 끼니를 때웠고, 가끔 주인 할머니는 팔지도 않는 소주병을 숨겨 놓았다가 한 병씩 꺼내 주시

기도 했었다. 가장 비참하고, 가장 불행하고, 가장 고생하던 시절이긴 했지만, 그만큼 행복하기도 했

던 시절이었다. 별 것도 아님에도, 첫 사랑이란 원래 위대한 사랑으로 취급 받는다. 모든 인간들에게 처음이란 아주 중요한 것이므로. 모든 것들의 시작이므로.

 

“준하를…….알아?”

 

나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준하의 친구들을 천천히 떠올

려 보았다. 준하와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 속에는 그가 없다. 아니, 내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딱 두 번 봤으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두 번?”

“여기서 두 번. 그 후엔 내가 준하와 연락을 끊었으니까.”

 

그제야 나는 기억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얼굴은 희미한데, 말수가 적었던 준하의 친구가 기억 속에

서 가물가물 거렸다.

 

“준하와는 끊었는데, 너하고 완전히 끊는 데엔 석 달이 더 걸렸지.”

“무슨 말이야?”

“내가 널 좋아했거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가 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과거의 마음을 고백

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학교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어. 준하랑 헤어졌다는 사실을. 그래서 한 번 찾아 갔었는데 이사했

더라구.”

“우리 집을 알고 있었니?”

 

나의 말에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무 섭섭한데? 두 번째 보던 날,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기까지 했는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정말 그제야 그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그날 나는 너무 취해

있었다. 준하와 이곳에서 할머니가 내주신 소주를 마셨고, 그리고선 심하게 둘이서 다투게 되었다.

준하는 화가 나서 먼저 일어나 가버렸고, 그가 내 곁에 남아 있었다.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순간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오래 전, 첫 사랑의 친구를 반가워해야 하나, 아님 불쾌하게 생각해야 하나.

 

“다 지난 일이야. 심각하게 생각하진 말구.”

 

나온 매운 떡볶이를 보아도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나는 먹을 생각을 못하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가 내게 젓가락을 쥐어 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런 우연도 있구나.”

 

나는 중얼거리며 그저 떡볶이를 헤집기만 하고 있었다.

 

“쉽게 알아보지 못할 줄은 알았지만, 너무 하네. 난, 금방 알아보겠던데.”

“택시 사건 때부터 알고 있었어?”

“어. 차를 함께 타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구. 그리고, 니가 반가워하지 않을지

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고.”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준하…….소식은?”

“이 년전에 결혼해서, 미국서 살아. 지난여름에 자동차 쇼가 있어서, 거기 갔다가 한 번 만났어.

와이프가 현지 사람이더라구.”

“외국인이란 말야?”

“어. 준하 말로는 전시회 준비하면서 알게 됐다고 그러던데, 그게 인연이 되었다고.”

 

준하는 원래 평범하지 않은 남자였다. 그는 학교에서도 꽤나 유명할 만큼 사고방식도 그러했고,

가치관도 남달랐다. 엉뚱한 면이 많으면서도, 괴상하기까지 해서 그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는

반면, 경계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한 마디로 괴짜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끌렸다. 평범하지 않은

그것이 마냥 좋았다. 그러나, 사랑이고 보니 평범하지 않는 그것이 내내 걸림돌이 되어 어긋났다.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점점 그에게 집착하게 되는 나를 보게 되면서 나는 그만 그

사랑을 끝내야겠단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준하에게는 새로운 연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나는 그에게 차인 셈이었다.


 

아마도 그가 집까지 바래다 준 날이, 준하와의 마지막 날이었던 것 같다. 준하와 다투고 나서 나는

그날 엄청 술을 마셨다. 그의 앞에서 울고 불며, 악쓰고 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거의 인사불성으로 그의 등에 업혀 집으로 갔던 것까지 기억해냈다. 준하와 끝이 나면서 저절로 그와 또 다른 친구들까지 연락을 끊었던 것 같다.

 

“너, 그날 소변이 급하다고, 길거리에서 그냥 저질렀었어. 나더러 망을 보게 하고선 말야. 웃긴 건,

바로 며칠 전에도 그랬다는 거지.”

 

아뿔싸. 이놈의 오줌통이 말썽이었군. 나는 너무도 창피한 마음에 허둥대며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얼굴이 화끈 거렸다.

 

“나, 니 엉덩이 벌써 두 번째 봤다. 그럼 볼짱 다 본 거 아니냐?”

“얘가 진짜. 술 취해서 그런 걸 가지고, 보긴 뭘 봤다구. 그리고, 고작 엉덩이 가지고 지금 다 본 것

처럼 말하니?”

“그날 너 나한테 뽀뽀도 했어. 그날 나한테 뭐랬는줄 아냐?

 

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점점 붉어져 오는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누나가, 너무 오래 굶었더니 요즘 헛것이 다 보인다. 니가 왜 이렇게 오늘따라 이쁘게 보이냐.

우리, 연애 할래?”

 

그가 내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하자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매운 떡 볶기 탓인지, 아님 첫사랑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서인지, 그것도 아님 그날의 추태가 창피해서 그런지 나는 울고 있었다.

슬프디 슬픈 12월의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바로 오늘이었다.



 

늦은 밤에도 아직 불을 끄지 않은 집들이 많았다. 밤새도록 축제의 기분을 느낄 심산인가 보았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정신이 없었다. 코트를 벗어 던지고 나는 침대에

바로 쓰려졌다. 지란은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 나는 울고 싶었다. 이마를 침대위에 박고 제 머리를

손으로 콩콩 쥐어박았다. 새해부터는 나에게 금주령이라도 내려야겠다는 결심이 커졌다.

 

“준하가 너에게 첫 사랑인 것처럼, 니가 나한테는 첫 사랑이었어. 부담 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또 착각하면 곤란하다.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그의 말을 떠올리자 괜히 마음만 심란해졌다. 나는 바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야. 난, 원래 솔직하고 대범한 여자가 좋아. 자기 감정을 속이지 않는 사람. 대놓고 연애

하자고 말하는 너처럼.”

 

그의 마지막 인사말을 떠올리자 심란해진 마음이 시끄러워지며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으아아악. 나는 미친년처럼 침대위에서 발버둥을 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랑은 언제나 유턴을 한다. '

 

그가 보낸 문자를 보며 나는 멀거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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