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518 광주사태
1980년 5월 22일은 김대중과 국민연합, 대학가 운동권, 민청 등 그의 추종세력이 전국적 민중봉기라는 명칭으로 내란을 일으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다행히 학생 주동자들 중 몇몇이 5월 16일 경찰에 그 사실을 알려주어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5월 18일 0시를 기해 5.17 긴급조치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내란 음모를 저지하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는 해방구가 선포되었다.
해방구는 본래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과 짝을 이루는 용어이기에 광주사태를 민주화 운동이라고 부르기에 앞서 그 용어 설명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반미의 뿌리가 된 광주사태는 계속 미국문화원들에 방화하며, 반미운동을 일으겨 오다가 마침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광주사태의 진실이 왜곡에 감추어져서는 아니되며 무엇이 광주사태의 진실이었는지를 물어야 할 때이다.

윤상원이 이끄는 폭도들이 광주 시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광주 MBC 방송국에 방화한 시간은 5월 19일 15:30 이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한 계엄군이 구조 활동을 하였기에 큰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광주사태가 중반기에 접어들기까지 공포탄조차 지급받지 못했던 계엄군과 달리 시민군은 초기부터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계엄군에 처음으로 공포탄이 지급된 때는 5월 21일 저녁 20만명이 넘는 시민군에 포위된 200명 미만의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탈출로를 열어야 했던 21일 저녁이었다. 그런데, 시민군은 이미 19일부터 기관총, 수류탄, 폭탄 등의 화기를 갖추고 있었으며, 21일에는 광주 군납업체 아세아자동차에서 털취한 장갑차들을 몰며 도청에 진입하였다.
5월 22일 광주시에 도청을 점령하여 해방구를 설치한 후 무장 시민군이 도청 입구를 철통처럼 경비하고 있다.

총을 들고 있는 청년들. 누가 아직은 순진하여야 할 이들을 국군에게 사격하는 폭도들이 되게 하였는가?

시민군이 발포할 때 쓰던 기관총이 도청 마당에 있다. 계엄군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기에 맨몸으로 폭동 진압을 하여야 했다.

시민군 중 다수가 군복을 입고 철모를 쓰고 지프차를 타고 있었기에 광주 시민들은 군인과 시민군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시민군도 시민군을 군인으로 오인한 발포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무장 시민군의 차량 행렬. 그들은 무장 유혈 폭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하였는데, 아마 어떤 배후 세력의 선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광주 시내에서 늘 총을 들고 다니던 시민군. 이들은 아무데나 총을 쏘았으며, 광주시민 희생자들 중 대다수는 시민군의 총에 맞았다.

이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5월 22일에 도청을 점령한 폭도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청 지하실에 광주시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치를 한 것이었다. 그 폭발물 설치자는 당시 광주에 있었던 자로서 광주 시민을 사랑하지 않는 자였을 것이다. 다행히 용감한 계엄군이 목숨 걸고 폭탄 뇌관 분리를 하여 수십 만명의 광주 시민의 생명을 구하여 주었다.

5월 27일 새벽에 폭도들의 손에서 광주시를 되찾아 광주시민들에게 돌려준 계엄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시민군이 한주간 어지럽힌 광주시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었다.

5월 27일 아침 부지런히 광주시를 깨끗하게 청소한 계엄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광주시민들에게 쌀을 배급하는 것이었다. 5월 22일 폭도들이 도청을 점거한지 며칠 안되어 광주에 극심한 생필품 부족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