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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의 허와 실, 인본주의로의 회귀

종교연구 |2013.03.07 10:15
조회 272 |추천 2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론에 대한 이야기.

 

인간은 신 앞에 영원한 죄인이며, 항상 속죄하고 회개해야하며 그 궁극적인 결과가 구원이다.

구원은 결과적으로 인간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사후세계의 보상이며, 인간 세상에서의 준비와 반성을 통해 인간 단독으로써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근원을 탈피하여 영원한 선과 신의 편에 합일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살고있는 현세는 악과 타락이 가득한, 끊임없는 유혹의 시험장인 셈이다.

한국 개신교에서 자주 언급되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이 세상에 당신을 낸 것은 다 이유와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구원론에 입각한 시각으로 풀어본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으려고 태어났으며 신이 주신 인생에서의 시험과 시련들을 이겨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평화속에 안식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대인이라면 절대적인 구원론에 대해 모순점이 많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에 신이 창조한 것들은 실제로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인간은 나름대로의 생존법과 보호장치를 구축해오고 있고, 인간의 한계와 역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만 이 이론이 설득력이 있다.

즉 인간은 너무 강해졌고, 인생에 만족하는 인간이라면 현세를 감사히 여기고 즐겁게 살아갈 방법을 찾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서 순수한 종교적 가치보다는 해결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 신에게 해결법과 보상을 요청하는 방법으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현대사회에서 절대적 구원론은 이미 힘을 잃었고, 내세의 막연한 환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절대적 구원론에 근거한다면, 인간은 직업을 가질 필요도, 사회를 이룰 필요도 없이 오로지 신을 섬기며 항상 실수를 조심하고 신의 말씀에 귀기울여 평생을 구원의 과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구원론은 역사에서 많은 인간들이 죽음을 당했던 시기, 억압되고 핍박받았던 서민과 하류계층에게 큰 옹호를 받았다. 기독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의 긴 역사를 살펴보자. 

 

법질서나 개인적 도덕개념이 잡히지 않았던 인간역사의 초창기에는 종교가 도덕을 대신했고, 권력자들의 통치이념으로 함께 자리했다. 초창기 기독교가 엄청난 호응을 얻으며 급속도로 확산된 것은, 소외된 계층과 핍박받던 자들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애초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겨났던 믿음이 기독교였다. 정확히는 이 당시 주로 유대인들이 믿었던 '유대교' 였다. 서민과 노예, 소외된 계층의 구심점은 이 강력한 믿음에 근거했고 당시 별도의 통치이념을 가졌던 로마에 대한 저항의 명분이 되었다.

 

로마군이 제도적으로 유대인을 탄압하고 그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대대적인 전쟁에서 결국 그들의 성지 예수살렘은 파괴되었고, '통곡의 벽'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에 큰 상처와 트라우마가 되어 후에 '시온주의'의 원인이 된다.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로마는 결국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밀라노 칙령 이후 국교가 되어 통치이념으로 자리잡는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로마가톨릭'의 모태가 된다. 이 때 로마에 포함되지 못한 기존의 신봉자들은 그들만의 해석과 신앙을 지켜가며 '유대교'로 나뉘어진다.

 

통치이념이 된 기독교는 최고권력자인 황제가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교황을 겸하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고, 구원론은 그들의 강력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유럽내의 영토분쟁으로 로마가 몰락하고 중세의 국가들이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역시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았고, 믿음의 근거인 '베드로의 후계자' 교황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국왕 이상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이슬람 세력의 팽창과도 연관이 있다. 전 유럽이 결속하여 전쟁을 치루는 확실한 명분이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유럽에서 보편적인 믿음이 되었고, 신의 뜻과 교황청의 귄위에 위배되는 인간적인 즐거움이나 학문, 지식, 예술은 금기시되고 탄압되었다. 이미 정치적 권력으로 변질된 배타적인 교리의 강요는 당시 지식인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르네상스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것은 인간성 자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나온 움직임으로, 권위와 억압에 대한 저항 즉, 인간의 자유, 고대 그리스로 부터의 천부인권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철학과 예술, 과학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다.

종교개혁의 움직임도 일어났는데 교황청의 외적인 형식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행위로 간주되어 주동자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교황청에서는 동로마제국 시대때부터 정치적으로 악용되던 잔혹한 고문의 방법인 '종교재판'을 더 강화하고 재판소에서 유럽 전역에 걸친 마녀사냥을 시작하여 공공연하게 화형을 집행하는 등 대립을 이어갔다.

 

이 무렵,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근대적인 형태로 변화한 유럽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선박기술과 신무기로 무장한 그들은 자원이 풍부한 남아메리카 지역을 발견했고, 계획적으로 침략을 준비하게 된다. 이들은 역시 통치이념으로 구원론에 근거한 기독교를 전면에 내세웠다. 당시 남미지역을 통일했던 '잉카제국'의 황제를 사로잡은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의 목숨을 댓가로 황금을 요구했고, 황제는 몇 개월에 걸쳐 전국으로부터 11톤에 상당하는 황금을 바쳤다. 약속과 달리 황제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단의 수장이란 죄목을 들어 화형에 처해졌으며, 잉카족은 불에 타 죽은 자는 영혼이 쉴 수 없다는 믿음을 가졌기에 화형을 면하려는 황제에게 기독교로의 굴욕적인 개종을 강요했고, 개종한 황제는 결국 참수된다.

무력으로 이 제국을 점령한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평생 댓가를 주지 않고 착취했으며 갖은 이유를 들어 고문하고 학살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잉카제국의 사원들 바로 위에 증축을 하여 성당을 지었고 성당은 본토에서 온 백인귀족들과 통치자들, 백인혼혈족들만 입장이 허가되었다.

이 시기 원주민들에게 관심을 갖고 포교를 시도한 것은 예수회 소속의 몇몇 사제들 뿐이었다. 정복자들의 도시계획으로 파괴된 이 문명의 원주민들은 광장으로 나올 수도 없었으며, 정복자들의 노예로 살아가거나 아마존 깊숙히 숨어버렸다. 이들은 근대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들의 역사나 문화는 점차 잊혀져갔다. 몇 세기가 흘러 이 국가들은 독립했지만, 라틴족 백인이 건설한 '라틴아메리카'로 불리게 되었고 기독교는 그들의 국교가 되었으며 혼혈민족과 서구문화로 잠식된 이 국가들에서 원주민들은 소수민족이 되어버렸다.

 

서인도제도의 아이티는 더 심각한 경우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에 점령된 이 나라는 유럽인들이 옮긴 전염병과 학살로 원주민이 전멸하고 만다. 정복자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대신 데려와 정착시키게 되는데, 후에 프랑스에 의해 재점령당한다. 착취와 학대로 얼룩진 역사를 가진 흑인들은 결국 정복자들의 통치이념을 부정하고 그들의 종교에 근거해 독립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처음 행해졌던 역사적인 종교적 모임에 대해 현재 기독교에서는 '국가전체를 사탄에 헌납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혼란과 빈곤의 문제로 서방세계의 지원에 의해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게 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유럽으로 돌아가서,

갈등구도를 이어가던 교황청과 지식인들은 결국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고, 종교전쟁이 시작된다.

교황청 소속의 신부였던 독일의 루터는 교황청의 타락, 특히 금전으로 죄를 면해주는 증서 '면죄부'에 대한 논리적 반박을 계기로 교회에서 파문당하게 된다. 그는 형식적, 상징적인 믿음을 버리고, 오로지 성서에 기초한 말씀과 순수한 신앙에 의거한 평등한 믿음의 기회를 강조하고 구원론을 전면에 제시하였다. 이것은 농민들의 강력한 결속력의 기반이 되어, 농민봉기로 나타나게 된다. 이 믿음은 후에 공산주의와 일부 개신교 교파의 모태가 된다.

초창기 루터와 노선을 같이하였으나 '빈부격차와 억압 착취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 천년왕국론을 내세우며 11조 폐지와 평등을 주장하는 농민봉기를 주도한 토마스 뮌쩌는, 급진적인 해석을 반대했던 루터가 의탁한 영주의 손에 처형되고 반란은 진압된다.

 

지식인들의 비슷한 움직임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다.

 

자유로운 사상가였던 스위스의 신부 츠빙글리는 기존 교회의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으며 성서를 체계적으로 재해석하여 시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교회의 경고를 받기도 했으나 성서를 기반으로 이론적인 변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미 자녀를 가진 아내를 두고 있었다. 아내가 있던 사제들과 함께 교구에 청혼서를 제출하면서 논리적으로 성서의 근거를 들어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교회의 형식과 권위에 반발하여 성화, 십자가, 제단, 오르간등을 없앨 것을 주장하는 등 개혁운동 과정에서 루터와 연합하게 되었는데 성찬론에서 부딪히게 된다.

 

성찬론이란 가톨릭교회의 의식인 영성체, 즉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으로 평범한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하는 의식이다. 기존 교회에서는 사제의 의해서만 가능한 성스러운 의식이므로 성직자의 권위의 근거로 간주되어 신교에서는 이를 다르게 해석했다.

루터는 사제의 능력을 부정하고 최후의 만찬에서 남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가능한 일이라고 규정, 츠빙글리는 의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상징적인 의미만을 기억하고자 했다. 후에 칼뱅은 이것을 절충하여 성령이 역사함으로써 평범한 물질이 예수님의 뜻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정리했다.

 

루터와 결별한 츠빙글리는 기존의 교회를 지지하는 영주들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게 되고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다른 이들이 이어가게 된다.

 

프랑스의 신학생이었던 칼뱅은 루터의 이론을 인용한 논문을 쓴 혐의로 수배되어 은신중에 기독교를 사도시대의 순수한 신앙으로 재해석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오로지 하나님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그는 이단박해를 피해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연구와 개혁운동을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친분을 쌓은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들은 후에 칼뱅을 지도자로 모시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존 스위스 교회의 지도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추방하게 된다. 스위스 한 지역의 영주가 된 그는 이전 츠빙글리와 같은 자유로운 해석을 금지하고, 기본적인 루터의 이론을 계승한 그 동안의 연구를 기반으로 새로운 교회의 규율과 체제를 정비한다.

 

기존 교회의 계층구조를 탈피하고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한 그가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역시 구원론이었다. 성직자 중심에서 신도중심의 신앙을 주장하면서, 신앙의 증거로써 신도의 엄격함과 질서를 강조했다. 오로지 신에 의한 통치만을 인정하였으며, 그 결과 그의 영지에서는 종교재판이 부활했고 많은 이들이 이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죽게된다. 한 기록에 따르면 '이단을 벌하는 것은 신도를 선으로 이끄는 사랑의 행위이므로, 이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한 도시의 주민을 모두 없앨수도 있다'는 칼뱅의 말이 남아 있다.

 

그는 성서를 순수한 신앙의 관점에서 재해석했으며, 이미 구원받을 것이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신과 인간이 맺은 구원의 계약을 확정하였으며 이 약속이 오로지 변함없는 예수를 통한 평등한 믿음의 계약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교회의 최고권위와 질서의 통솔이 신에게 귀속되어 있다고 못박았다. 그의 이론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종교개혁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그도 결혼을 함으로써, 목회자들의 결혼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성서와 예수중심의 신앙, 성령에 의한 영적성장과 구원에의 도달 등 주요 내용들이 오늘날 개신교의 모태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국왕과의 대립을 통해 종교적으로 교황청과 완전히 분리되었고 국왕이 개신교를 인정함으로써, 교황청 세력은 힘을 잃고 종교개혁이 완료된다. 후에 영국 국교회에 반발하여 칼뱅주의를 외치던 일부가 미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칼뱅이 정립한 이론에 기초한 교회는 개신교의 출발점이 되었고, 후의 산업의 발달과 세상의 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종파로 나뉘어졌다.

 

즉, 신의 권능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온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이며 루터를 시작으로 많은 이들이 성서와 교리, 근본적인 믿음에 대해 새롭게 연구하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시민혁명 이후 왕정이 무너지고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면서,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했다. 이것은 성서를 근대적의미로 재해석 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진화론을 수용하고 기존의 구원론을 탈피하여 운명적 속죄를 대신해 자발적인 회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후 등장한 신정통주의는 전쟁의 참상으로 나타난 자유주의 신학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영으로 쓰여진 성경'이라는 영감론을 부정. 성서의 문자적인 해석을 지양하고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이해하려고 했다. 자유주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근거를 수용하여 성서를 재해석하고 현대사회에서의 믿음의 의미에 대해 연구하는 입장이다.

신정통주의는 오늘날 북미와 유럽지역의 많은 기독교 교파들과 맥락을 함께하고 있으며, 현지인들의 종교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기독교는 영국에서 성공회와의 마찰로 미국으로 떠난 일부 칼뱅파 지도자들에 의해 정립된 청교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국은 초창기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개척되었는데, 원주민이던 북미인디언들은 역시 학살과 전염병으로 150년 사이에 인구가 25%수준으로 급감한다. 프랑스, 네덜란드도 분할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고 영국도 계획적인 식민지 개척을 시작한다. 박해를 피해 이주한 영국인 청교도들과 영국본토에서 이주된 대규모의 죄수들, 아프리카 노예들, 유럽 다국적의 이주민들이 영국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

 

영국이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식민지를 양도받음으로써 세력을 확장하게 된 식민지 세력은 자체적으로 학문, 도덕적인 계몽운동을 시작하는데, 이 때 중심이 된 것이 청교도 중심의 '대각성 운동'이다.

대각성 운동은 노예제에 대한 시각차이를 발생시킴으로써 후에 남북전쟁의 원인이 된다.

그 후 프랑스를 축출하고 영토를 확장한 그들은 정치적인 기반을 다지며 단독정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미국이 탄생한다.

 

산업자본가 중심의 북부와 농업자본가 중심의 남부는 정치적으로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결국 분리된 이념으로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 전면에 등장한 이념이 평등한 믿음의 기회, 구원론에 입각한 칼뱅주의였다. 결국 청교도 이념에 근거한 북부가 승리하고 노예제는 폐지된다. 통일 후까지 지속된 원주민 말살전쟁에서도 이단을 인정하지 않는 칼뱅주의가 명분이 되었다.

완전한 국가의 체제를 갖춘 후, 칼뱅주의에 기반을 둔 청교도 정신은 정치이상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았고 국민적 신념으로 정립되었다.

 

한국은 임진왜란때 왜병과 함께 들어온 신부에 의해 천주교가 전파되었고, 19세기 말 강대국들의 아시아 진출과 함께 선교사들의 전래로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초창기 기독교는 쇄국정책 중심이던 조선왕조에 의해 크게 탄압받기도 했으며, 정세가 불안정하던 조선 말기에 시대의 변화를 읽으려 했던 실학자들과 뜻을 함께하게 되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영세를 받은 자가 생겨났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었다.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개화기 조선에 들어와 교육, 문화, 사회적으로 지대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칼뱅주의는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625전쟁, 재건의 역사를 거치면서 불안한 정치상황과 빈곤속에서 문화적으로 선두의 아이콘이 되었으나 칼뱅주의에 근거한 청교도 정신이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았다.

전통적으로 유교적인 이념이 강력했고 교세가 뿌리깊은 불교와, 혼란기를 거치면서 민족종교로 등장한 신흥종교의 영향력도 컸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대부분은 한국기독교협의회를 구성했고, 언더우드의 신념을 이어가던 대한예수교 장로회도 해방 이후 대한기독교 장로회로 분리되어 기독교협의회에 참여하게 된다.

 

2차 대전 종전 후에는 초교파적인 기독교 단체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세계교회협의회(WCC)이다.

이것은 신정통주의 이후 등장한 움직임으로, 교리와 성서 해석에 따라 흩어진 교파들이 보편적인 교회와 '삼위일체이신 한 분 뿐인 하나님'을 목표로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WCC측은 단지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형식을 표준화하고, 교파간 교리에 근거한 배타성을 지양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단체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구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개신교 교단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내의 칼뱅주의 교단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80년대 후반 보수파 장로교가 주도하여 자체적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결성하였다. WCC에 참여한 교단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구원론에 있다.

WCC교단들은 기존의 배타성에서 벗어나 타 종교의 구원론도 존중하고 일방적인 개종강요를 지양하고 있으나, 한기총 소속의 교단들은 오로지 성서에 입각한 칼뱅적 구원론만을 인정하며 이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거리전도와 해외전도에 나서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포교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미국이며 2위가 한국이다. 여기에는 국내 칼뱅주의 교단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적극적 포교를 바탕으로 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하고 있으며, 정치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한국 기독교의 중심이 되려한다. 칼뱅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강남 삼성로를 '칼빈로'로 개명추진해왔으며, 정치자들의 종교적 발언에 관여, 교육과 사회운동 분야에 종교적 명분으로 관여하고 있다. 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거부하거나 무시하면 '한국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공격'으로 규정하며 반발하고 있다.

 

구원론은 시대 상황에 따라 인간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어왔고, 칼뱅의 해석 역시 마찬가지다.

구원론은 신과 인간의 관계와 믿음을 통찰하는 '인간적 해석'이며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로 이미 증명되었다. 구원론이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작용할 때는 항상 인간이 그 중심에 있었다. 구원론을 증명하고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피를 흘렸다. 칼뱅 역시 마찬가지다.

 

힘 없는 자를 보호해 줄 사회적 장치가 미약했던 시절, 부조리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했던 칼뱅의 구원론은 이미 색이 바랜지 오래다. 이제는 불만과 부조리를 말하기보다 주어진 것들을 여유있게 둘러보며 감사를 나눌때다. 이미 이 개념은 한국 칼뱅주의의 모태가 된 미국 청교도에 스며들었다. 검소하고 절약하며, 감사하며 나누는 삶의 자세는 자발적인 사회봉사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관계 속에서의 믿음의 실천은 궁극적으로 이교도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서 증명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지 마라'는 내용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로마서에 누누히 드러난 부분이다.

이제 더 이상 구원론은 분열과 투쟁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한때, 칼뱅적 구원론은 공산주의의 전제이념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속죄를 강요하던 시대는 지났다. 아무도 문자적인 단편적 해석을 근거로 인간을 불행의 운명에 빠뜨릴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현실이 아니기에. 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고, 축복을 내려 인간을 행복하게 변화시켰다. 인간은 지난 1500년 동안, 오로지 신에 대한 연구에 얽매여 왔다. 신의 의도를 해석하려는 실체인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를 바탕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의 재조명이 필요할 시점이다.

 

새로운 구원론은 인간의 내면을 부정하고 변화시키려는 '인간의' 모순된 의도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두려움과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이해함으로써 신의 뜻에 보다 가까운 구원론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450년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지 않을까?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 이루어진 이 노력은 앞으로도 진지한 고민과 반성의 자세로 지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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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 '로마가톨릭'의 시작은 밀라노 칙령 이전이며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시대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이전, 시저 사망 후 옥타비아누스가 초대황제가 된 시기이다. 황제가 교황의 위치를 겸임했다는 것은 동로마제국의 '동방정교회'이며, 로마가톨릭의 교황이 이미 존재했고, 동방정교회의 수장의 명칭은 '교황'이 아니었다. 밀라노 칙령을 전후하여 로마가톨릭이 시작되고, 기독교가 권위를 얻게 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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