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이야기 (24)
18 동지 팥죽 한 그릇에 나이 한 살 더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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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이 끼어서인가 동지 때만 되면 나는 꼭 객지에 있다. 집에서 동지를 맞지 못하다보니 팥죽을 맛 볼 기회도 자연 없다. 집에 있다한들 예전처럼 푸지게 팥죽을 쑤어 동네에 나누는 것도 아니고 내 고집에 아내를 졸라서 겨우 한 끼 먹을 죽을 쑤기도 하지만 분위기는 동지분위기가 아니라 별미로 팥죽 한번 끓여 먹는다는 변덕을 부리는 걸로 치부해 버린다.
11월을 동짓달이라고 한다. 동지가 11월에 들기 때문이다. 어릴 때 할머니는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라는 유행가를 비감하게 불렀다. 그 노래는 어린 나에게는 청승맞게 들렸지만 할머니가 즐겨 부르는 노래였다. 동지는 하루의 해가 하지로부터 차츰 짧아지기 시작하여 극한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로,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기도 하다. 음기에서 양기로 넘어가는 날이기 때문에 매서운 겨울추위에 시달리다 동지를 기점으로 날씨가 낮이 길어지기 때문에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다. 그래서 역법에 동지를 설날로 하기도 하였다.
동짓날은 어느 집이나 팥죽을 쑤어 먹어며, '한 살 더 먹었다'고 했으며 설날 떡국을 먹고 '한 살 더 먹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했다. 동짓날이면 집집이 빠짐없이 팥죽을 쑨다. 동지 팥죽은 붉은 빛깔이기 때문에 축사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역귀뿐만 아니라 모든 잡귀를 쫒는 데 사용되어 왔다. 장독대에 붉은 맨드라미나 봉숭아를 심는 것도 같은 뜻이다.
붉은 것은 주술적인 의미에서 사악함을 쫒아내는 것으로 전통적인 우리네의 오랜 풍습이었다. 팥죽을 쑤면 먼저 솔가지에 적셔 정지 문에 뿌린다. 그리고 대문을 비롯하여 담벽이나 마당에까지도 뿌려 잡귀가 집안으로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구에 있는 신목에도 금줄을 치고 팥죽을 뿌려 마을에 있는 잡귀까지도 쫒아낸다.
집안의 잡귀를 다스리고 나면 아낙들은 팥죽을 집집마다 돌린다. 돌린 팥죽은 받은 집에서 다시금 채워서 보낸다. 할머니는 집집마다 들어온 팥죽을 한 국자씩 팥죽을 담아 장독대위에 둔 다음 날 아침 그 표면에 아무런 금이 생기지 않은 그릇은 다음 해에 농사가 잘 되고, 금이 생기면 그 해 농사가 나쁘다고 했다. 특히 그릇 가에 물기가 있으면 비가 많이 오고 물기가 없으면 가문다고 했다. 시골에서 전래되던 팥죽점이었다. 할머니가 동지 팥죽 그릇을 살피시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이제는 동짓날이 되어도 팥죽을 쑤는 집도 드물어지고 또한 팥죽을 쑨다고 해도 이웃과 나누어 먹을 만큼 많이 쑤지도 않는다. 나이만큼 새알심을 넣어 먹었던 동지팥죽, 비록 동지가 지났을지언정 오늘은 시장에 나가서라도 필히 한 그릇 사 먹어야 하겠다.
김 명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