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38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고?”
“언니가 원하면 당장 할 수 있다고 했다니까. 꼭 두 번 말해야 알아들어?”
묘향 언니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혜림아, 근데 내가 아까운 것 같지 않아? 윤기는 직업도 안정적이지 못하고, 나이가 어리니 살면서 피곤할 것도 많을 것 같단 말야.”
기대면 눕고 싶다고 했던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셋째 언니의 거만함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입술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다음에 제이 오빠한테 전화 오면 그렇게 전해주면 되는 거야? 오빠에 비해 언니가 아까워 결혼 못하겠다고.”
“얘는 참! 그건 우리끼리 얘기지.”
우리끼리도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저런 건 혼자 삭여도 되는 이야기다. 남자 친구가 도망간 동생에게 저런 말을 하는 심보는 무슨 심보란 말인가? 행복에 겨워하는 언니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던데 언니가 멋진 남자를 두고 자신이 아깝다는 고민을 하는 판국에는 속이 다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언니가 아까운 것 같아. 잘 생각해봐. 제이 오빠는 얼굴만 잘 생겼지 생활력이 있는지는 모르잖아. 남자는 무엇보다 생활력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언니가 늘 말했잖아.”
“그 점이 걸려, 걸려. 고민 좀 해 봐야겠어. 아무래도 내가 아깝단 말이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언니를 뒤로하고 고소해하며 병진이에게로 갔다. 적어도 삼일 전전긍긍할만한 고민거리는 던져 놓았으니 며칠 샘나게 자랑할 만한 일은 없겠지.
오늘 병진이와 나의 첫 업무는 산더미같이 쌓인 수건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꿀꿀하다.”
침묵을 깨고 병진이가 말했다.
“그러네. 휴우.”
한숨 섞인 동의에 병진이는 말이 없었다.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바짝 마른 수건은 늘 날 기분 좋게 했다. 기분이 좋은 날이든 정신없이 바쁜 날이든 거칠거칠한 감촉이 저를 사용해 주세요, 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단 착각이 드는 것이다.
하얀 수건을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접었다. 이리 저리 엉켜 있던 수건들을 차곡차곡 줄 세워 놓았다. 내 마음도 병진이의 마음도 이렇게 쉽게 정리가 되는 것이라면 한숨을 쉴 이유는 없을 텐데.
“이런 날은 서루 오빠 차 같이 멋있는 차타고 미사리에 있는 라이브 카페에 가서 커피한 잔 마시는 게 좋은데. 비가 오면 더 좋고.”
“기차 모양의 카페였으면 좋겠어.”
서루 오빠라는 이야기만 빼면 좋은 생각 같았다. 그리고 다시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수건들이 조용히 접히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영규 오빠에 비해 형편없는 아이였어.”
침묵을 깬 병진이의 말은 진창 속에서 스멀거리며 기포가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내부에서 썩고 있을 때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가스 같은 느낌.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를 하는 말투였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이 들 때면 어제의 일도 아주 멀게 느껴지는 법이다.
“네가 형편없다니? 언니들 말대로 나쁜 남자에게 잘 못 걸린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잘못을 더 많이 한 쪽은 나였던 것 같아. 조용히 쉬고 싶다는 사람에게 윽박지르고, 잠도 안 재우고 싸움만 했으니.”
“그만해. 그 정도는 누구든 다 하고 살아. 너 부족하고 잘 못 된 것 하나도 없어. 남자 때문에 청승 떨지 않기로 했잖아. 병진아, 우린 멋진 여자들이야. 우릴 마다하는 사람은 남자라고 할 수가 없어. 분명 여자거나 다른 임자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하하. 너 공주병 제대로구나. 맞아. 그 사람들이 운이 없는 거지. 맞지?”
“그럼. 지금쯤 후회를 하고 있을 거야. 용서를 빈다고 해도 넘어가주지 말자.”
두 남자가 동시에 떠나버린 것이 큰 다행이었다. 나를 제외한 주변 여자들이 모두 행복했다면 배로 힘들었을 것이다.
“혜림아! 서루 오빠 불러라.”
“뭐?”
“서루 오빠 불러서 미사리 가자고 하자. 응?”
“어떤 상태인 줄 뻔히 알면서. 이 상황에서 불러내는 건 잘 지내보자, 그런 뜻 밖에 더 되냐?”
“좋은 오빠로 남고 싶다고 했다면서?”
“그렇긴 하지만.”
“칼로 자르듯 딱 끊지 말고 만나면서 좋은 오빠로 지내는 게 더 자연스러워. 너희 솔직히 그렇게 심각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부모님 인사만 했던 거지.”
“그런가? 그래두 오늘 보기는 싫어.”
“너 진짜 서루 오빠 안 만날 거야? 민성 오빠도 연락 없이 도망간 마당에?”
“안 만나. 민성 오빠랑 상관없이 나랑 인연이 아닌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그럼 나 해줘라. 버리긴 아깝다.”
“뭐?”
“왜 이렇게 흥분해? 나한테 넘겨주기는 싫지?”
“그건 말도 안 되지. 어떻게 친구한테 넘기냐? 서루 오빠가 물건도 아니고.”
“남자 친구 말고 좋은 오빠 삼게. 사람은 좋아보였어. 그것도 안돼?”
“그거야 내가 막을 수 없지만 난 만나는 건 별루야.”
“그럼 나 전화번호라도 줘라. 응?”
힘도 센 병진이는 막무가내로 내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이름으로 번호를 찾아내더니 냉큼 전화를 걸었다.
“오빠! 저 병진이에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순간 병진이가 찜질방을 관두고 성우가 되면 어떨까 생각을 해보았다.
“오빠,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저 미사리 라이브 까페 가고 싶은데. ······. 혜림이요? 혜림이도 당연히 가죠. 왜 저 혼자만 가면 안 돼요? 헤헤. ······. 당연히 섭섭하죠. 혜림이한테는 허락받았어요. 좋은 오빠 삼아도 된다구요. ·······. 제가 책임지고 데리고 갈 테니 걱정 마세요. 여섯 시요? 예. 그럼 그때 뵈요.”
병진이는 전화를 끊더니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런 좋은 남자를 마다하다니 네가 니 복을 찼지. 거 봐. 처음부터 내 말 들었으면 좀 좋냐? 좋다고 따라간 남자한테는 결국 채이고 꼴 좋다.”
“뭐? 왜 갑자기 시비조야?”
“부러워서 그런다. 너 안나오면 나오지도 않을 기세더라. 보니까 마음 정리 하나도 안됐구만.”
“언젠가는 하겠지.”
“지금이라도 내 말 듣고 마음 고쳐먹어라. 서루 오빠 아까워 죽겠어.”
“너 그런 소리 자꾸 하면 안 나간다.”
“알았다. 알았어. 어디서 튕기는 건 배워가지고. 에잇, 치사해. 빨리 수건이나 개셔.”
병진이에게 나간다고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계속 갈등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맺어질 사람도 아닌데 만난다는 것이 개운치 않았다.
‘나가지 말까? 아니야. 병진이가 분위기는 띄울 거니까 어느 정도 맞춰주다가 내 마음을 확실히 전하자. 정리한답시고 따로 만나는 것보다 낫겠지.’
“그 두 사람 지금 어디 있을까?”
오후 약속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또 영규 오빠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글쎄. 모르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서울엔 없을 거야, 두 사람.”
“아는 것 있어?”
“아니. 그런 생각이 들어. 멀리 있다는 게 느껴져.”
멀리 있다는 느낌은 공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오는 것 같다. 마음이 가까운 사람은 먼 타지에 있어도 자신의 수호신처럼 항상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6시 정각 서루 오빠의 멋진 하얀 차가 찜질방 앞에 도착했다. 다시는 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차였는데. 별 생각 없이 차에 타려던 나를 병진이가 밀치고 날름 조수석에 앉아버렸다. 어쩌면 나를 위한 배려일지도 모를 행동이 자리를 빼앗겼다는 섭섭함으로 이어졌다.
“아시는 좋은 곳 있어요?”
“네.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지만 한 번 가보죠.”
병진이가 옆에 있어도 별 거리낌이 없는 서루 오빠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조금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졌다고 할까 한 발 뒤로 놓고 보니 정말 스타일 좋은 남자였다. 예상대로 이어진 병진이의 수다에 말을 해야 하는 부담 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오길 잘했다.’
뒷좌석에 앉아 편하게 바라보는 한강은 보는 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을 좋게 했다. 아직 병진이처럼 초조해하지 않은 이유는 민성 오빠에 대한 작은 믿음 때문이었다.
돌아오리라, 꼭.
짧은 여행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내게 돌아올 거야.
“마음에 안 들었어?”
“아니. 맛있었어.”
식사를 마치고 나와 인적이 드문 주차장에 서루 오빠와 단 둘이 있었다. 미리 이야기를 해 놓은 대로 병진이는 화장실에 간다며 우리에게 시간을 내주었던 것이다.
“많이 못 먹어서 걱정했지. 너 좋아하는 횟집으로 갈 걸 그랬나?”
“여기 그런 곳이 어디에 있다고.”
“하긴 횟집은 서울이 낫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연히 발 밑 자갈을 툭툭 차내고 있었다.
“오빠! 그냥 좋은 오빠로 남아주면 안 되겠어?”
“네 마음이 날 떠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아. 하지만 막상 듣고 보니 정말 잔인한 말이다. 도저히 안 되겠니?”
“응. 다른 사람이랑 상관없이 오빠는 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널 놓치기 싫어.”
“······.”
“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 내가 널 사랑하면 되는 거야. 넌 받기만 해.”
“그럴 수는 없어.”
“처음엔 행복하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불행하게 하지도 않을 거야. 절대 네가 불행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내 힘닿는 데까지 널 행복하게 해 줄 거야.”
귀를 막고 싶었다. 이렇게 힘들고 외로울 때 저돌적으로 구애를 하오면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듣지 못한 이야기로 여기기로 했다.
한 마음엔 오직 한 사랑만 해야 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