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네이버 미스터리 박물관
(http://cafe.naver.com/mysterymuseum)
작성자 angel_entity
오겠다는 남자친구가 오지 않아서 잔뜩 화가 나 있었어
평소라면 화를 내다가
애꿎은 수화기를 던져버렸겠지만
그 날은 그럴 기운도 없었어
어찌할 줄 모르고 우울해져서는
나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려고 했어
그런데 우유가 없는 거야
되는 일이 없다고 더 낙심해서는 이걸 나가서 사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
약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초인종을 누르면 될 텐데 이런 식으로 호출 당한 건 처음이라-
하지만 틀림없이 쓸데없는 사람일 거라
아무도 없는 척 했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면 사라져 주는 게 예의일 텐데 말이지
쓰레기 같은 자식
끈질기게 노크를 해 대서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난 여기 없는 사람이라고!
배짱을 부려보다가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보통은
- 계세요? 계십니까?
한 마디라도 하고서는 쿵쿵쿵, 리드미컬하게 두드려야 정상 아냐?
그런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사람의 음성이란 전혀 섞이지 않고
단조롭게, 같은 박자로
쿵....... 쿵...... 쿵......
.
.
.
이미 스파게티 같은 건 머리 속에서 지워지고
그 노크 소리에만 집중하게 되었어
현관의 구멍으로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얼어붙은 듯 한 자리에 서 있었어
그런데 조금 뒤에
그게 현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 이상 현관에서는 그 소리가 나지 않았어
콩....... 콩......
아까보다 조금 더 작게
신발장 나무문에서 그 소리가 나고 있었어
내가 헛것을 듣나보다 도리질을 쳐도
자꾸자꾸 다시 또 다시
내 의심을 사그러뜨리고 존재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그 소리가 나에게 다가왔던 거야......
순간 무슨 용기였는지 나는
- 꺼져! 어디서 장난질이야! 저리 꺼져! 나가 죽어버려!
라고 소리쳤어......
그러자 이번엔 보란듯이 현관문이 덜그럭거리더니
열려버렸어
.
.
.
- 그렇게 말할 것 까지는 없잖아?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남자친구가 들어왔어
갑자기 울컥해서 눈물이 솟았어
긴장이 풀려 손에 들고 있던 스파게티 면은 다 쏟아버렸고-
그 저질스런 장난은 뭐냐고 그를 비난했어
물론 그는 장난 따위 치지 않았다고 했어
안그래도 약속을 어겨 미안한데 장난 칠 마음의 여유가 있었겠냐고
자기가 들어오는 걸 눈치채고 나가 죽으라 악담을 한 거 아니었냐고
미안한 건 미안한 건데 너도 좀 심하다고
정색을 하더라고
- 신발장
하고 내가 말했어
- 너가 신발장에도 장난을 한 거 아냐?
그는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라
신발장에서 나는 소리 따위
만들고자 마음 먹으면 못 만들 리 없었어
아직도 현관에 멀뚱히 선 채로
신발장? 하고 그가 묻더니 그게 뭐 어떻냐는 식으로
신발장의 나무문을 열었어 그리고는
- 이런 거나 들어있구만
낙엽 한 장을 꺼내 내 눈 앞에 펄럭여 보였어
가을이면 어디에나 즐비한 낙엽,
그 중 하나가 신발에 붙어 온 모양이었어
- 잎이 이제 많이 져버렸잖아
그가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고
제법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들을 보며
그제서야 나는 과거의 어떤 기억이 겹쳐지는 걸 느꼈어
.
.
.
내게 첫번째로 낙엽의 의미를 가르쳐 준 사람은
우리 외할아버지야
난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거든
가을에 창밖에 낙엽이 지는 모습을 보고
저게 뭐냐고 물었더니
외할아버지가
나뭇잎이 죽는 거라고 했어
이제 수명이 다 되어서 나무를 떠나는 거라고
사람도 죽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어
난 죽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림책에서 무덤을 본 적이 있어서
죽어서 혼자 무덤에 들어가면 심심할 테니
무덤에 창문을 내고 밖을 쳐다보는 게 낫겠다고 했어
가끔 나와서 누구하고나 같이 놀다 가는 게 낫겠다고 했어
할아버지는 그렇게는 안 된다고 했어
죽은 사람은 산 사람과 섞일 수 없다고 했어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맹랑하게도
- 할아버지도 아직 안 죽어봤으면서 그건 어떻게 알아?
라고 반문했고
티격태격 약간의 논쟁이 오가다가
남들과 다른 독특한 구석이 있어 서로 죽이 잘 맞았던 할아버지와 나는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걸어버렸어
보고싶을 테니까
만약 언젠가 할아버지가 죽어서 여기 올 수 있다면 한번 와서 나를 보는 걸로...
.
.
.
내 이야기를 듣고 남자친구는
- 외할아버지야말로 장난이 심하셨구나 정말 엉뚱하신 분이었네
자기는 도무지 손녀에게 죽으면 보러 온다는 둥,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어
하지만 그와 함께 장을 봐 오고 고대하던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는 동안
엉뚱한 할아버지의 손녀인 엉뚱한 나는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
뭘 알지도 못하고 꺼지라 욕이나 하다니-
할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왔던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서
말씀을 하기 힘드셔서
무언가 두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셨기 때문이야
.
.
.
또......
남자친구가 신발장을 열 때 이끌려 나온
웬 검은 형체가 슬슬 움직여
아직도 열려있는 현관으로
순식간에 스윽 빠져나가는 걸 봤기 때문이지......